240109 아카데미

 

아카데미 울새찬가

고위 귀족 가문의 장자로 태어나 늘 차석인 남자×일백 년 전에도 저 소녀가 존재했단 소문이 도는 여자

둘이 입학 직후부터 만나지는 않고 소학교 마지막 학년 2학기에 만날 것 같네
네가 그 도련이야?
당신이 그 샛별이듯이요.
마법부의 수상한 여자는 생각만큼 두렵지 않았고 문예부의 고요한 남자는 생각만큼 말수 적지 않아서
마지막 학년 막학기라고 중등부 올라가기 전에 재능있는 애들은 예습 시킬 겸 학과 모아모아 가르칠 듯
문예부는 이런 거 배워?
네. 마법부에선 누가 지붕을 부쉈다던데.
마법부 수석 여자는 늘 좋은 의미로든 다른 의미로든 보는 눈이 많았겠지 삼 년을 같이 다녔는데도 비밀 많아 뵈는 여자애니까
도련 또한 만만찮게 같이 지내는 이 없어서 홀로 동떨어진 듯한 두 사람일텐데 점점 세계가 겹쳐가겠거니…
여튼, 소학부의 시절은 그저 그렇게 클래스메이트의 시간
중등학부에 들어서자 선택 과목 생겨나며 겹치는 시간 더 생길 듯하고
눈이 마주친 건 어느 날의 미술 교양 수업

교실 밖으로 나가지 않고 눈에 보이는 세 가지를 그려 보세요
친구 연필 창밖 모두 됩니다
라는 말에 주위를 둘러보다 눈이 마주친 건 어떤 일?
아이들 도란도란 자리를 옮겨 서로서로를 그리자면 그 둘은 홀로 창밖을 그리거나 석고상을 그리러 움직이겠지
누가 먼저랄 새도 없이 옷깃을 잡아 줘
그렇게 구석에 모여서 서로의 손끝을 그리자면
맞닿은 살갗이 어쩐지 어색하게 느껴지는 일이야
도서관에서 그토록 마주쳐도 아무렇지 않게 스쳤던 나날인데
이제는 고개 까딱이며 인사하는 날이 늘었지
점점 거리가 좁혀지는 걸 모두가 알게 된다면
이젠 중등학부의 졸업이 찾아와
졸업을 축하합니다
이제 한 학부만 거치면 성년이군요
준성인의 이름을 달고 ⋯
이야기들이 들려오는 가운데 여자는 도통 보이지가 않지
무리 속에 파묻혀 건네오는 말에 답함서도 여자를 찾다가
도저히 안 되겠어서 교수에게 물어봐 줘
아, 너는 다른 전공이라 몰랐구나
그애는 교환학생 갔어
그렇게 삼 년간 서로의 존재가 흐려지고 점차 자신의 생을 살아가게 되겠지
안녕, 새로운 얼굴들
안녕, 잊혀질 교과서
안녕⋯⋯ 
졸업이 코앞이라 버릴 도서를 정리하자면 저도 모르게 끼어있던 종이조각을 발견해 줘
언젠가의 조별 과제를 같이 했던 메모니까 말야
그걸 보고 가만 그 자리에 있어 줘

혹시 같이 춤출래요?
아뇨, 조금 어지러워서요.
그런저런 핑계를 대며 졸업 무도회 끝자락까지 남아있어 줄래
하지만 소녀는 보이지 않을 거야
삼 년이라면 사람 하나의 존재는 잊혀지기 참 쉽지
그렇게 당신만이 기억하는 여자에게
제 첫 춤을 선사하고 싶어서 점점 모두 떠날 때까지 있어 줘
홀의 문이 닫히고 슬슬 달 떠오를 때즈음 넓은 산책로에는 당신 뿐이야
어디선가 틀어두었던 음악은 꺼지지도 않고 머리를 헤집어
있지, 십이 월에는 눈이 와
갑작스레 내리기 시작한 눈에 놀라 뒤를 돌아보면
안녕
그 자리에 내가 있어
많이 보고 싶었어?
손을 내밀어 줄게, 잡아 줄 거지?
맨발로 떠나 맨발로 돌아온 여자의 손끝을 잡고
그 사이 하나도 키가 자라지 않았다며 낮게 웃고
그런데 머리칼은 자르지도 않은 거냐며 속삭이고
낡은 축음기의 목소리를 배경 삼아 춤춰 줘
아카데미의 문은 닫히지 않을 거니까
산책로를 빙글빙글 돌아 줘⋯⋯

(c) 낄

 

몇 년 뒤, 다 같이 졸업생들을 축하할 겸 모인 자리에서는 낯선 듯 익숙한 여자가 그해 차석의 옆에서 손을 흔들어서
정들었던 학교를 떠나보내어 밤이 새도록 노래를 부르자
술에 취한 이들이 한둘 집에 가고 나머지는 홀에서 퍼질러 잔다면
그때의 산책길에서 동트는 걸 보며 말해 줄래
나랑 결혼해줄 수 있을까?

그러니 이건 캠퍼스 로망스라기엔 거리 멀지만 사랑으로 끝나는 어떤 감정선의 이야기